이야기
Summer Breeze
미라수
2011. 10. 21. 02:52
지난 주부터 일주일에 다섯 번은 병원엘 드나들었다. 큰고모가 큰 수술을 하셔 아산병원에 올라와 계셨기 때문이다. 시험기간에 가뜩이나 팀플로 정신 없었는데 고모가 수술까지 하시니 일주일 용돈벌이 알바는 물론이거니와 시험도 뒷전이다. 암 덩어릴 떼어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가족들 모두가 패닉 상태였다. 고모부와 사촌 형이 차례로 직장에 휴가를 내고 목포에서부터 올라오셔 고모 옆을 지키고 계셨다. 고모부와 사촌 형이 내려가면 삼촌과 내가 돌아가며 그 자릴 대신했다.
사방이 두꺼운 벽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병원은 환자와 보호자 온몸의 기운을 야금야금 빼가 버리는 곳이다. 병문안을 하러 병원에 왔다가 오히려 병원에서 몸져누울 지경이니,,
09년 여름은 내게 있어 참 힘든 시기였다. 그보다 일년 전 훈련소에서 발목을 다쳤었는데 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틀 뒤에 30Km 행군을 했던 것이 문제였다. 발목을 접질렸기 때문에 조치만 제대로 받았더라도 괜찮았을 경미한 부상이었는데,,
군번이 지독히 꼬여 막내 생활을 일년이나 했기 때문에 감히 수술을 받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참고 참으며 후임이 오기만을,, 그렇게 일년을 기다렸다. 정식 명칭은 좌측 족관절 비골건 탈구. 09년 5월 말, 병가 휴가를 받고 나와 광주의 한 정형외과에서 수술을 했다. 일년이나 방치해 툭툭 빠지는 인대를 붙잡아 줘야 할 힘줄이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복숭아뼈 뒷부분을 깎아내 움푹 패인 곳에 인대를 고정시켜야 한단다. 한 오십 분쯤 수술을 했을까? 마취했으니 괜찮겠지 했는데 어쩜 그렇게 하반신 자체가 아프던지,,
오랜 시간 입원을 해야 한다. 집 가까이에 있는 함평국군병원으로 복귀 절차를 밟고 그 해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시절을 한 줄로 축약하면 “절망과 염세의 나날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나는 한참 어리지만, 지금보다 두세 살쯤 더 어렸던 여름날, 살면서 최초로 그리고 진중하게 ‘삶’과 ‘죽음’에 대해서 꽤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힘들어했었다. 수술 이후의 막연한 두려움과 무기력함에서 비롯한 감정이었을 것. 그 당시의 일기들을 읽으면 지금도 허세 돋게 눈썹을 모으며 나름 진지해진다.
그러나 불안하고 깨지기 쉬웠던 그 여름의 나를, 지극히 짧은 순간에 좌절의 구덩이에 빠져 있던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아주 사소하면서도 아름답고 또한 중요한 것들이었다.
2009 7 30
요즘 늘 그랬듯이 저녁 투약 끝나자 마자 밖으로 나왔다. 아이스크림을 한 조각 베어 물고 잔디 깔린 운동장으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모든 것. 풍경과 바람과 기온과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들까지,, 그렇게 마음이 상쾌해질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하늘이 너무 예뻤다. 어느덧 높아진 하늘을 보니 여름의 끝이 보이는구나. 특등품 한우 꽃등심의 마블링같은 구름때들이 높은 곳에서 해질녘의 황금빛 하늘을 덮고 있었다. 태양까지 가렸으니 눈이 부시질 않아 마음껏 하늘을 보며 걸을 수 있었다. 초속 3~4미터 정도 불었을 한여름의 바람이 뜨겁지 않고 이렇게 상쾌할 수 있다니,, 잔디운동장에는 이제 도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방아깨비 천지다. 작은놈들이 영리하게 요리조리 잘 뛰어다닌다. 철수, 진모 아저씨의 사랑타령이 즐겁다. 오늘따라 음악들도 좋다.
한 시간 반 가량의 산보는 마음 깊은 곳에 쌓였던 근심, 걱정 더미를 허물어 주었다. 어느새 떠있는 달은 져버린 태양의 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수술에 의한 후유증은 지금도 어쩔 수 없지만 사는데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것이다. 탁구도 잘 치고 횡단보도의 파란 불이 깜빡일 때면 잽싸게 잘 달려간다. 호텔 연회장 알바를 뛰며 다른 테이블 sos라도 할 때면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다.
그러나,,
JB Project는 일본 퓨전 그룹인 Casiopea 전성기를 이끌었던 드러머 Akira Jimbo와 미국 베이스의 슈퍼 플레이어 Brian Bromberg가 의기투합하여 결성한 프로젝트 재즈그룹이다. Summer Breeze는 2003년에 발매된 이들 첫 앨범의 여섯 번째 수록 곡인데, 이 곡명의 산들바람은 어느 여름날 나를 위로해 주었던 그런 바람을 말함이 아닐까?
다행히 고모의 수술은 잘 끝나 항암치료도 필요 없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어 내일 모레쯤 퇴원하실 수 있을지 일주일 정도 더 계셔야 할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수술이 잘 돼 감사.
모두가 발 벗고 나서는 가족들임을 감사.
모두가 발 벗고 나서는 가족들임을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