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straila #03 현실
일주일의 시간, 5월이 되기 전에 일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있던 시티잡, 즉 식당이나 호텔 등이 보이면 족족 들어가 이력서를 주고 나왔다. 잡 에이전시는 물론이고 며칠에 걸쳐 공장 지대를 돌며 돌린 이력서가 50여 장은 족히 넘는다. 인터넷 지원까지 합하면 못해도 100군대 이상은 지원했으리라.
한국의 두 배가 넘는 교통비나 음료의 가격 때문에 얼마 없는 돈을 아끼고자 최대한 걸었다. 남반구에 위치한 이곳의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었으나 한낮의 볕은 한국보다도 뜨거웠기 때문에 집에서 나오기 전에 음료수 병에 물을 담아와 아껴 마시곤 했다. 때론 몇몇 사람들과 기름값을 나누어 내며 이곳 저곳으로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열심히 이력서를 돌렸지만 인터뷰라도 해보자고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일주일이 가고 또 한 주가 지났다. 나와는 상관이 없을 것 같았던 불안과 조급함이 슬몃슬몃 엄습해온다. 한국을 떠나기 전의 자신만만함은 어디로 갔는지 점점 이력서를 건네고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져만 간다.
선택을 해야 한다. 급여가 다소 낮더라도 한인잡을 구해 당장 입에 풀칠을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일자리를 찾아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하는가?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4월, 그러나 이미 연초에 들어온 각국의 수많은 워홀러들이 공장이든 호텔, 식당이든 빈 자리를 꼭꼭 매운 탓이었다. 들어가는 곳곳마다 하는 말들은 지금은 빈자리가 없으니 나중에 자리가 생기면 연락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워홀러들에게 잘 알려지고 인기 좋은 몇몇 공장들은 하루에도 100통 이상의 이력서가 들어와 이력서 자체를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적어도 6월은 돼야 고국으로 돌아가든지 한곳에서 일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간인 6개월이 지나 어쩔 수 없이 그만두든지 해서 하나 둘 기회들이 생길 것이다.
두 번째는 당연히 영어였다. 초반에 줄기차게 시티 내를 돌아다니며 호텔, 레스토랑, 카페, 바 등에 이력서를 돌렸으나 영어가 유창하지 않으면 힘들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 것 외엔 소득이 없었다. 거기에 웨이터보다는 웨이트리스의 수요가 높았다. 한번은 인터뷰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와서 가봤더니 나 포함 열네 명의 사람이 고작 한자리를 위해 왔더라. 검은 머리의 동양인은 나까지 단 세 명. 나머진 호주, 유럽 각국의 사람들이었고 결국 합격이 됐는지 안 됐는지조차 통보를 받지 못했다.
3주가 지나서야 처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에이전시를 통해 들어간 냉동 파스타나 피자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러나 공장이 바쁠 때만 사람들을 불렀기 때문에 잘해야 일주일에 한두 번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당장의 생활비는 마련할 수 있어 감지덕지 일했다.
한인잡인 오피스, 풋볼 경기장 청소도 해보고 호주 사람 아래서 밤새도록 빵, 우유를 배달하는 일도 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일자리를 잡는 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동부엔 일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나니 서부로 왔건만 오히려 지금은 상대적으로 선택권이 적은 이곳의 사정이 더 안 좋으면 안 좋을 수도 있다는 게 현지 분위기다.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