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이병률 / 통

미라수 2012. 6. 20. 23:54

      

     




                                     

                                                              

                                                        이병률


 

  이 좁은 마당으로는 다 받아낼 수 없는 봄이 내려앉고 있건만 대문 옆에 놓인 커다란 페인트 통은 가득 물을 담고 있다 일부러 모른 척했던 통이다

 

  한겨울 아침이면 얼어 있다가 어떤 날은 멀거니 녹았다가 또 어떤 날은 다시 얼어버리고 만 통 안의 물이다 지난 가을 칠을 했으나 무엇이 불만인지 벗겨지고 일어나는 페인트가 담겼던 통이다

 

  물은 증발되어서도 멀리 가지 못하는 공기인 척하다가 다시 비나 눈의 입자로 날아와 넘치도록 몸을 채우고 몸을 넓혔을 그리하여 여태 물이 가득한 통이다

 

  통을 비울까 하여 들어보지만 가뿐히 들리지 않는 통이다 어색하게나마 달과 별을 담았던 통이라 다 비워버린다 해도 우물쭈물 통은 언제 그랬냐 싶게 물을 담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아예 뒤집어놓지 않으면 슬픔의 질통이 마를까봐 이 지경으로 담고 담는 거라면서 내 깊은 불출의 골병을 아는 체하려 들 것이다 일부러 모른 척해야 할 통이다






이병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바람의 사생활을 특히 아낀다. 한 편의 시가 아닌 한 권의 시집을 통째로 읽어야 한다고 깨달은 건 이 시집 때문이었는데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신기할 정도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커다란 주제, 흐름, 작가의 감정, 생각 등을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쓸쓸하나 아름다워 읽고 또 읽었다마침 이 사진을 찍었던 곳은 이병률 시인의 고향인 제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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