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stralia #08 Sam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만 갈 수 있었던 파스타 공장을 언제까지나 의지할 수 없어, 자정이 넘은 밤에 이 지역 저 지역을 돌며 빵이나 우유, 혹은 다른 식품들을 배달하는 일을 하기로 했던 건 지금으로부터 10주 전의 일이다.
마침 내가 처음으로 트레이닝을 받으러 간 날이 오래된 구식 차를 처분하고 최신형 새 냉동차로 바꾼 날이었기 때문에
연신 싱글벙글 이었던 고용주는 Nice Guy라는
수식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Sam이라는 이름의 밝고 듬직한 남자였다. 밤 9시
반에 출근해서 새벽 5시쯤 끝나는 배달 일이었는고, 당연히
첫 일 주일은 고용주인 Sam과 함께 돌면서 일을 배워야 했다. 하루
동안 평균 120가구를 도는데 말이 백여 가구지 한밤중에 커다란 냉동차를 운전하며, 익숙하지 않은 내비에 의존한 채 낯선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는 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말 어렵고 피곤한 일이었다(정말 내 기대와 상상을 초월했다). 급하게 운전을 하며 다녀야 하니
굉장히 위험하기까지 하다. 내비에 100여 가구의 집 주소를
일일이 검색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내비는 그저 거리나 동네 이름만 슥 한번 훑는 종이 지도와
같은 용도에 불과했다. 운전을 하며 집집이 현관이나 울타리에 적힌 번지수를 눈으로 찾아야만 했는데 익숙하지
않으니, 아니 설령 익숙해진다 하더라도 눈의 피로와 긴장은 여전할 게 분명해 보였다. 집을 찾으면 달리듯 차에서 내려 냉동고를 연 후 리스트를 보고 고객이 주문한 식품들을 챙겨 고객의 집 앞에
놓고 와야 했는데, 주로 우유나 치즈 같은 냉장 보관을 필요로 하는 식품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통 현관문
앞에 놓인 푸른색의 에스키백(아이스박스, 혹은 가방)에 가지런히 담아두었다. 새벽 시간의 밤고양이 같았던 배달임에도 서비스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Sam이었기에 정말 매번 가지런히 담아두었는데, 감명까지 받았던 그의 서비스정신은 호텔의 그것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 30여 집을 돌았는데 벌써 숨이 턱 끝까지 찬다. 언제 남은 팔십여 집을 돌고 집에 갈 수 있을까? 보통 하루에 100건의 배달을 하는 택배기사 아저씨들(많게는 150건도 한다더라)이 쥐꼬리만 한 돈을 받으며 얼마나 힘든 일을 하고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어느 오월의 가을밤이었다. 늘 택배를 받을 때면 턱선으로 송골송골 맺힌 기사 아저씨의 땀방울에 고맙고 한편으론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 차가운 물이라도 대접하곤 했는데, 물 한잔 마시는 그 시간도 아까워 벌컥벌컥 들이키고 달려나가시는 기사 아저씨의 모습이 영락없이 우유배달을 하는 내 모습이었다.
낮엔 종일 빌보드 차트 순위권에 있는 그렇고 그런 요즘의 대중가요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지만, 자정이 넘으니 별도의 DJ 없이 오래된 팝송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더라. 많은 노래를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내가 따라 흥얼거리니 Sam이 꽤 놀라는 눈치였다. 몇 시간 동안 여러 가수와 노래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몇 해 전, 본 조비의 공연엘 갔었고 워낙 비쌌던 티켓을 구매했기에 공연이 끝난 후 무대 뒤로 가 본 조비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그가 어찌나 부럽던지 모른다. 좋아하는 부류의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한 집의 배달이 끝날 때마다 샘은 양손의 엄지를 힘차게 치켜들곤 했는데, 드디어 그 횟수가 백 회가 넘었다. 새벽 네 시 반쯤. 영원할 것 같던 배달 일이 끝났다. 본격적인 배달을 열한 시부터 시작했는데 둘이서 했음에도 네 시 반이라니 사실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나 혼자서 하게 될 때면 도대체 언제 끝난다는 말인가? 동이 트고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에 과연 배달은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마저 찾아왔다. 이제 여기서 샘의 집까지 가면 다섯 시쯤 될 것이고 도로 내 집으로 돌아오면 여섯 시 조금 못 되리라. 처음, 단 하루였지만 내가 생각해도 참 빠르게 일을 잘했던 것 같다. Sam도 새로 온 내가 계속해서 이 일을 하길 바라는 눈치였고, 더는 대안이 없던 나 역시도 힘들지만 익숙해지리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배달 일을 하기로, 내일 밤에 또 보자는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어찌나 침대가 간절했던지 고속도로 위를 날아와 침대 위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정오쯤이나 됐을까? 전화벨이 울려 비몽사몽 간에 전화를 받았고, 그 전화 후에 나는 Sam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배달 일을 할 수 없게 됐노라고 알려야만 했다. 한 시간 뒤까지 인터뷰하러 올 수 있느냐고 물어왔던 수화기 너머의 그곳은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워킹홀러 사이에서는 호주의 삼성이라 불리는 ALS 그룹이었다.
Sam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내 선임자와 함께 또 다른 후임자를 찾으려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사실 미안한 마음 그 전에 근성 없는 한국인이란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 끔찍이 싫었기에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나서서 한 것이었다. 두 달도 더 지난, 단 하루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가끔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던 그 모습이 여전히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