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헌혈의 추억

미라수 2013. 3. 25. 23:16








대한적십자에서 주는 은장을 탄 뒤 헌혈하고 싶다는 생각이 뚝 떨어져 미루고 미룬 게 햇수로 3년이었다. 그 시간이 길면 또 얼마나 길다고 그새 많은 게 변해있었는데, 초코파이의 포장은 시대를 역행해 다소 촌스럽게 변해있었고, 헌혈 전 자신의 몸 상태에 관해 직접 종이에 작성했던 방법은 이제 마우스 클릭이 대신했다. 헌혈을 하면 주었던 3000원짜리, 5000원짜리 문화상품권을 모아 음반을 사모으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문화상품권은 더는 주지 않는 것 같았다. 대신 무명으로, 원한다면 내 명의로 소정의 금액을 어려운 국가나 사람들을 택해 기부할 수 있는 사은품 아닌 사은품이 생겨났는데, 질도 나쁘고 있어도 안 쓸 화장품이나 손톱깎이 세트를 받아오느니 이왕 좋은 일 하는 거 조금이라도 더 보람되게 하자 해서 물 부족 국가에 기부하겠노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 가난했던 깨개곰 삼총사가 영화표를 얻기 위해 처음으로 피를 뽑았던 그날의 헌혈 버스 풍경이 여전히 선하다. 재수할 땐 어떻게 하면 공부 아닌 헛짓거리를 할 수 있을까 해서 마치 중독처럼 피를 뽑으러 다녔던 곳이 전대 후문에 있는 헌혈의 집이었다. (거기 참 예쁜 간호사 누나가 있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간 건 아니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대방역이나 서울대입구역 헌혈의 집을 많이 다녔었고, 가끔은 봉사활동 때문에 자주 지나치던 신도림에서도, 시체처럼 컴퓨터 두들기는 알바를 하러 다녔던 수유에서도 헌혈의 집에 드나들었었다. 명동에서 약속을 기다리며 헌혈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라 갈 때마다 길 찾느라 애먹기도 했고, 아기 주먹만 한 함박눈이 조용히 내리던 어느 겨울날은 피곤했던 건지 창밖의 눈 내리는 풍경이 비정상적으로 예뻐 보여서 그랬던 건지 헌혈을 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날도 있다. 어찌나 깊이 잠들었던지 헌혈이 끝난 뒤에도 간호사가 한참이나 나를 깨우지 않았던 그날의 평화가 가끔 생각난다.


오랜만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배가 고파 그랬는지 은근 속이 매스꺼웠던 오늘은 나의 마흔다섯 번째 헌혈이었다. 늘 그랬듯 익숙하게 초코파이 두 개를 집어 들고 나왔다.


 - 2013,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