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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바세린



늘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건 피부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화장실로 가는 몇 걸음이 으슬으슬 하다면,, 나도 모르게 돋은 얼굴의 각질들이 각질각질 질각질각 노래를 부른다면,, 불어오는 찬바람에 입술이 터 립글로즈를 바른 애인의 입맞춤이 애타게 생각난다면,, 그 땐 바야흐로 가을인 것이다.
 
20년을 살았던 부모님의 집에도, 여름이고 겨울이고 방학 때면 빠짐없이 지냈던 시골의 농장에도, 생각보다 바람 같이 지나갔던 군 시절의 관물대에도, 코딱지만한 고시원의 단칸 방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온 베트남과 홍콩에서도, 지금 사는 미아리의 수해 경험 있는 꽤 넓은 반지하 집에도, 그러니깐 종합하자면 내 인생에 가장 오랫동안 함께 했던 것. 그것은 바로
 
바.세.린.
Vaseline Intensive Care PURE PETROLEUM JELLY

그 무엇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바세린이 언제 어떻게 발명 됐는지 사실 잘 모른다. 그냥 석유 찌꺼기 추출물 어쩌고만 어디서 들은 것 같긴 하다. 엄마께 듣기로는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아주 어렸을 적 미국에서 살고 계신 엄마의 고모께서 커다랗다 못해 대빵만한 바세린을 사다 주셨다고 한다. 그렇게 바세린과의 인연은 시작됐다. 애국적인 마음에서 국산품을 애용해야겠지만, 바세린만은 오로지 미제를 써야 한다. 그게 진짜 바세린이다. 국내 제약회사에서 만든 보라색, 녹색 뚜껑의 희멀건 무엇을 한번 써보고는 내다 버렸다. 그것은 바세린의 ‘바’자에 대한 예의도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차라리 바나나킥이라고 하면 믿었겠다. 갑자기 바나나킥이 먹고 싶다. 아,, 달짝지근한 바나나킥,,;;;
파란 뚜껑, 누런 용기에 한글은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이 페트롤 어쩌고 하는 듣도보고 못한 영어가 적혀진 그것이 진짜 바세린이다. 약국이든 남대문 수입상가를 가든 바세린을 찾을 땐 꼭 이렇게 외치자. 

아줌마 미제로 주세요!

늘 만병통치약, 상비약 리스트 0순위에 주저 없이 바세린을 올려 놓는다. 바세린의 진가는 거북이등껍질처럼 피부가 다닥다닥 갈라지는 겨울에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종격투기를 보면 팀닥터가 선수의 살이 찢어져 긴급 지혈을 하고 얼굴의 상처에 듬뿍듬뿍 사랑을 담아 퍼 발라 주는 게 바로 바세린이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살짝 베여 피가 나면 급한대로 바세린을 발랐는데, 왜 그랬을까 지금 가만 생각해보면 기름성분의 바세린이 물이나 다름 없는 피와 섞일 수가 없기 때문에 피가 밖으로 흘러 나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역시 바세린은 찬바람과 콧물로 인해 트고 헌 피부에 최고의 진가를 보인다. 입술이 텄는데 립밤, 립글로즈 따위가 없다면 자기 전에 주저 말고 바세린을 퍼 발라라. 아! 참고로 밖으로 나가기 전에 바르는 바세린과 집 안에서만 있을 때(특히 잠자리에 들기 전) 바르는 바세린의 양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반짝 반짝 바세린이라는 동요도 있지 않는가? 식물성인지 뭔물성인지 모를 기름 덩어리 바세린은 웬만한 광택제보다 더욱 강력한 반짝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건조한 한 겨울날 외출시의 포인트는 피부에 매우 얇게 펴 발라주는 것이다. 가벼운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피부 결을 따라 이마 한 가운데서부터 양 옆으로. 콧등에서부터 광대를 타고 양 볼로. 물론 입술도 마찬가지. 특히 남자인 경우 양 조절을 잘못했다가는 사람들의 묘한 시선에 지하철 화장실 휴지로 애써 바른 입술의 바세린을 닦아 내야 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으니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요즘엔 가만 보면 ‘약’이 아닌 ‘미용’ 기능을 강조하는 바세린이다. 각질엔 어줍잖은 로션보다 바세린 한방이면 끝! 다시 말하지만 포인트는? 매우 얇게. 하지만 자기전이라면 앵두 같은 본인의 입술에 바세린을 아낌없이 발라주자. 거짓말 같은 큰 일교차에 하루 종일 콧물을 훌쩍거려 여름 내내 샤방했던 코 주위가 헐었다면 그 때도 바세린 만한 것이 없다. 침대에 눕기 전 파란 뚜껑을 열어야 하는 아주 사소한 귀찮음만 이겨내면 당신의 헐어 있던 코는 그 다음날이면 말끔해진 채로 전혀 쓰리지 않을 것이다. 후시딘? 마데카솔? 지나가는 바나나킥이 웃지. 사실 이러한 효능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겨울에 피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손등이 쩍쩍 갈라져 피가 나는 사람들 여럿 있다. 나 역시도 어렸을 때 자주 그랬다. 한겨울에 손등이 갈라지면 어찌나 따가운지, 점점 자라면서 어느 때부턴가 옆구리도 터서 따끔거리고 복숭아뼈 위의 살도 갈라져 피가 보이더라. 나이 많은 어른들을 발바닥이 쩍쩍 갈라지기도 한다. 바디크림은 일시적인 방편일뿐 피까지 나올 정로도 터버린 곳을 아물게 해주진 못한다. 그런 징조가 보이기라도 할 때면 주저 없이 바세린을 발라주는 것이다. 자기 전에 듬뿍듬뿍 발라주는 게 좋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있을 때 깔끔하게 아물어 있는 살을 보면 신기하다 못해 바세린에서 경외감이 느껴진다.
수십 년 동안 농장 일을 하신 삼촌께 추천한 바세린의 효능을 인정받았을 때의 그 뿌듯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의 내 꿈은 웃기게도 ‘삼촌이 되는 것'이었다. 그만큼 내게 우상이었고 지금도 그런 존재인 삼촌이 인정한 바세린이다. 우리 집안이 다 그런지 우선 아니꼽게 바라보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삼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추천하면서도 내심 두려웠던 오륙 년 전 겨울의 기억. 게다가 삼촌 역시도 초록색, 보라색 뚜껑의 어디 이상한 국산 바세린은 전혀 효과가 없다고 했으니. 아,, 삼촌과 사촌 형과 함께 늘 덤, 더머 그리고 덤스였던 겨울. 그 겨울의 시절이 너무나 그리워.
군대에서 한 겨울에 맨손으로 구리스를 양손에 듬뿍 퍼서 자동차 바퀴 속에 무슨 조형이라도 하는 양 섬세하게 쳐준 다음 그 미끈한 구리스를 제대로 닦아 내기 위해 DF(경유)에 손을 담궈야 했을 때. 그 DF는 또 얼마나 독한지 손 마디마디가 죄다 갈라지는데 그 쓰리고 아픈 손과,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해준 것 역시 바세린이었다. 이러니 유독 건조해지는 겨울철에 바세린 안 찾고 배길 수 있어?
난 그 인센티브 케어ㄹ 퓨어ㄹ 페트롤늄 젤리 바세린을 감히 만병통치약이라고 부른다.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갈 때면 치약은 없어도 바세린은 꼭 챙겨야 한다. 
 
바세린엔 기묘한 점이 있는데,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도대체가 바닥이 안 나와! 이것이야 말로 마르지 않는 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끝판왕이다. 엄마의 고모가 주신 바세린을 20년 가까이 썼으니 정말이지 님좀짱이다.
이제 슬슬 바세린 예찬은 이쯤 해서 마치자. 백날 말해봐야 직접 써보지 않는 이상 들어 먹히지 안으리란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알바고 시험이고 생각 않고 이따위 글을 이 새벽까지 쓰고 있다니,, 바세린이 뭐길래,,
 
뭐길래?
 
조상들이 사랑한 된장과 같은 존재. 언제나 우상인, 웬만해선 잘 인정하지 않는 삼촌도 인정한 존재. 그리고 사랑스런 애인의 립밤 바른 입술과 같은 존재. 

이것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바세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