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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까만 하늘


오늘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날이 오면 가려고 했었지요. 그러나 자꾸만 망설임이 절 붙잡았던 터라 갈팡질팡 거리다 어제서야 마음을 정하고 뒤늦게 보니 인터넷의 예매는 이미 매진 됐더라구요. 그래서인지 오늘은 잠에서 깨어 눈을 뜨자마자 마음이 급했던 게 사실이에요. 행여나 현장에서 티켓을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그런 마음이었죠. 
 
이러한 이유에서 좀 일찍 집을 나섰어요. 원래 같으면 지하철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갔겠지만, 이번엔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중간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 탔죠. 당신이 늘 보는 곳의 풍경을 보고 싶었던 거에요. 서울을 조금만 빠져나오니 벌써부터 여유가 느껴지더라구요. 꽤 자주 지각이냐 아니냐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춰 뛰어가곤 했던 당신에게 밖의 풍경을 볼 여유가 있었을까요? 여전히 그렇게 뛰어다니고 있나요? 
 
흐릴 줄 알았는데 오늘도 하늘은 꽤 예뻤어요. 거리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고갤 들어 관악산 자락을 보니 이미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을이 깊이 여물었더라구요. 이른 시간이라 적막한 매표소에서 물어봤어요. 없을 테지만 혹시 제 이름으로 된 초대권이 있는지 찾아봐 주시겠어요?라고,, 여전히 바보 같죠? 표를 한 장 사고서 보니 세상에 앞에서 세 번째 줄인 거에요. 덜컥 겁이나 자리 바꿔줄 수 있으냐고 물어보았더니 현장 구매 티켓은 안 된다 그러더라구요. 
 
공연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극장 길 건너 스타벅스에서 녹차라테를 한잔 시켜 두고 앉아 있었어요. 우린 늘 커피빈에서 난 아메리카노를 당신은 카페라테를 마셨죠. 그러나 아주 가끔 스타벅스에 갈 때면 난 녹차라테를 그리고 당신은 카라멜 마끼야또를 시켜 마셨던 거 기억 나요? 내가 마시는 녹차라테는 여느 곳과 달리 묽지 않고 녹차 향과 맛이 참 깊었고 당신의 카라멜 마끼야또는 늘 아래 가라 앉은 카라멜 시럽이 진짜배기였죠. 당신은 그 카라멜을 조금 맛보곤 그래 이거야.라며 내게 꼭 밑바닥의 시럽을 먹어보라고 권했었죠. 고백 하나 할께요. 우리모두 커피빈을 좋아했지만, 사실 머그잔만은 커피빈보다 스타벅스를 더 좋아해요. 
 
기다리는 동안 당신이 내게 남기고 간 책을 꺼내 읽었어요. 책의 안쪽엔 언젠가 다시 보길 기대하는 당신의 편지가 써져 있네요. 우리가 과연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는 날이 찾아 올까요? 얼마 만에 읽는지 모르겠어요. 최대한 천천히 읽고 있거든요. 안도현의 시가 적혀 있네요.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구의 배경이 되어 주는 것이다.
별을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이제 공연이 시작할 시간이네요. 
일부러 제 자리에 앉지 않고 비어있던 맨 뒷줄에 앉았어요. 
아,, 당신이 무대에 오르고 있어요. 어느새 한 계절이 바뀌고 본 당신이네요. 오늘의 공연 주제는 포레의 레퀴엠이라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군요. 그것 말고는 변함 없이 그대로네요. 늘 세밀한 감상문을 요구한 당신인지라 이번에도 귀를 기울여 감상하고자 했으나 사실 마음 졸이며 본 탓에 어떤 감상평을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다만 죽은 이를 위로하고자 만들어진 레퀴엠이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살아가는 이에게 이리도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지 몰랐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문득문득 당신이 미소를 짓네요.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이에요. 정말이지 막상 보면 끝없이 슬퍼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요.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내겐 그걸로 충분했어요. 
당신, 아주 가끔씩 누군가를 찾듯이 객석 이곳 저곳을 살피는 것 같더라구요. 그게 혹시 나일까요? 멀리서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겨우 진정시키며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신에게 감사했어요.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죽네 죽이네 하면서 너무나 힘들어 하고 있는데, 그보다 좀 더 아프게 당신을 떠나 보낸 나는 함께한 추억을 고마워하고 당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음이 진심으로 감사하더라구요.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앞으로도 까만 하늘이 되어 당신 몰래, 당신이 빛날 수 있도록 늘 응원하겠어요.

당신이 모를 오늘의 하루였어요.
구둣발에 피곤 할 당신. 푹 쉬어요.

PS. 슬퍼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