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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Austraila #05 Falcon


눈앞에서 트레인을 놓친 덕에 교회까지 먼 길 자가용을 타고 가야 했다. 폭풍우가 얼마나 거세던지 차가 제 몸을 못 가누더라. 돌아오는 길의 도로 사정은 정말 좋지 않았다. 부러진 수많은 나뭇가지들을 피하느라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역시 자가용을 타고 출근을 한다. 도로 중간중간 전기가 나간 신호등이 많아 문자 그대로 운전대를 잡은 손이 후덜덜 했다. 8, 연구소로 도착하니 문 앞에서 기다리던 제니 할머니 왈 전기가 나가 출입문 자체가 열리지 않으니 오늘은 집에 돌아가란다. 어쩐지 주차된 차가 없더라니. 자연재해 앞에 한낱 나약한 인간인 내가 뭘 어쩌겠는가? 집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비번을 즐겨야지..

기사를 보니 호주 서부지역 폭풍우 피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뿌리째 뽑혀 있던 거대한 나무들은 순간 시속 140km까지 불었던 폭우를 동반한 강풍의 작품이었다. 트레인은 운행을 중단했으며 전기가 나간 가구, 사무실의 수가 110,000이나 됐다. 어제 눈 앞에서 교회로 가는 트레인을 놓친 건 신의 도움이었나 보다.

 

삶은 시작부터 선택의 연속이다. 내가 태어난 것도 부모의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당장 벌떡 일어나 씻어야 하는지 5, 10분만 더 잘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대부분 이러한 사소한 선택들이 하루 하루의 주를 이루며 개개인의 인생을 구성하지만 때론 정말 신중하게 몇 날, 몇 일을 고려해야 할 선택과 결정들이 있다. 프로스트도 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먼 훗날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여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 어떻게든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

호주에 가야겠다는 선택 역시 어쩌면 남은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온 이후에는 정말이지 매 순간,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해야 하는데,(때문에 치밀하게 계산적이고 정이 없는 사람이 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칫하면 어떠한 소득도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자와 돌아가는 자. 워홀러들은 크게 이렇게 두 종류로 나누어지지 않나 모르겠다.

 

열흘이 지났다. 이 열흘을 짧다고 여길지 모르나 의지할 이 없는 타지에서 가진 돈은 바닥을 드러내 가는데 일자리는 도무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점점 희망과 의욕을 잃어 가는 시기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이제는 무언가 새로운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 사실 한인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에는 하루에도 몇 개씩 한인 사장 하의 일자리들이 올라 오지만 아무래도 평균 급여가 낮다 보니 그것들은 가장 마지막 대안으로 남겨두고 있었다.(참고로 한인잡의 평균 급여는 시간당 13불에서 잘 주면 15, 즉 한국 돈으로 14000원 가량이지만 그럼에도 호주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시티 내 적정한 시간대의 일자리가 아니면 교통과 다양한 쉬프트의 문제로 자가 차량을 요구하는 곳들이 대부분이라 눈을 뜨고도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에이전시 등을 통해 지원한 공장에서 당장 내일 출근하라고 연락이라도 온다면 그야말로 자가용은 필수다. 동부의 골드코스트는 한국처럼 대중교통이 잘돼있어 밤 12시 이후에도 돌아다니기에 문제 없을 정도라고 하지만 이곳 퍼스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생각보다 훨씬 열악했다. 비용은 얼마나 비싸던지 기본 요금이 2불이 넘는데다가 거리에 따라 배로 뛰기 때문에 오히려 기름값이 더 저렴할 수도 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열심히 걷고 또 걸어도 이력서를 돌리는 것엔 한계가 있다. 자가용을 타고 이 지역, 저 지역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모자랄 판이니 오죽하겠나? 아무리 가을이라지만 한낮의 태양은 여름의 한국보다 더 따갑게 느껴진다.

 

차를 사야겠다.

차가 있으면 분명 하루뿐인 일거리라도 할 수 있으리라. 이력서 역시 훨씬 수월하게 돌릴 수 있으리라. 지금껏 이력서를 돌린 곳에서 내일 당장 출근하라고 해도 문제 없으리라. 가진 돈 모두 끌어 모아 차를 구입하고 나니 딸랑 10불짜리 지폐 한 장 남았다.

97년 식. 15년 동안 24km를 달린 차. 그러나 왠지 믿음직스러운 이 녀석은 포드의 팔콘이다. 꼴에 나름 4000cc 대형 세단이라며 리터당 10km도 못 달리니 결과부터 말하자면 지금도 열심히 연비 좋은 차를 찾고 있는 중이지만 그래도 이놈 덕에 매일 문제 없이 출퇴근하고 있으니 참 고맙기만 하다. 내가 사는 이 집엔 총 다섯 대의 차가 있는데 그 중 3대가 길 한복판에서 멈춰 섰었다.(2대는 그냥 길도 아닌 고속도로였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이 녀석이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라 생각함은 나름 운전병 출신의 별 근거 없는 자뻑이라 해두자. 차를 사고 좀 더 쉽고 빠르게 이력서를 돌리며 또 한 주를 보냈다. 그 동안 두 번쯤 파스타 공장에 불려가 평생 못 먹을 양의 당근과 브로콜리를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 퍼 담으며 방세를 마련하고 입에 풀칠을 했다. 그리고 정확히 3주째 되던 날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그 전주에 이력서를 넣었던 회사였다. 자동차 없이는 이력서를 넣으러 가겠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문제될 게 없었다.







어느덧 출근한지 5주를 채워가고 있다. 불안할 정도로 여유로우면서도 또한 바쁨이 행복한 나날들이다. 이게 다 애증의 팔콘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