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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차 좋아하세요?









차(茶) 좋아하시나 봐요? 라는 질문을 들었던 밤이었다.

막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운 참이었다.


차..

업무에 지친 직장인이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뽑은 자판기의 300원짜리 커피나 인사동을 거닐던 객이 발걸음을 멈추고 들어와 앉은 전통찻집의 차를 찬찬히 들고 마시는 즐거움을 과연 누가 마다할까? 그러나 좋아하느냐의 요지는 단순히 차의 맛이 아닌 물을 끓이고 준비해둔 차나 커피를 내리는 사소한 행위를 즐기고 아끼느냐는 것일 테다.


물을 끓이고 손수 간 커피 원두나 잘 마른 찻잎을 모아 필터로 걸러내며 차를 만드는 과정은 지극히 쉬운 일이나 사실 해보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최소한의 기구들을 구매해야 하고 맛을 까다롭게 신경 쓰는 차 애호가라면 천차만별인 커피와 차의 세계에서 인내를 가지고 내 취향의 그것을 찾는 과정도 필요하다(물론 이 역시 매력적인 일이다). 처음엔 재미있고 뿌듯하기도 해서 열심히 핸드밀을 돌리지만, 어느 순간 열심히 인터넷을 뒤적이며 커피머신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차를 준비하는 과정을 각별히 여기거나 뚜렷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일련의 과정들을 조금씩 편리한 방법으로 줄여나가게 되는 건 분야를 막론한 모든 시대의 그림 아닌가? 내가 가진 핸드밀도 그런 과정을 겪어 놀려두다 우리 집으로 온 경우다.


내가 특별히 부지런해서 원두를 가는 건?.. 역시 아니다. 차 맛을 가지고 까다롭게 굴 정도로 잘 알지도 못해 특별한 맛을 기대하고 마시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루 중에 아주 짧은 시간을 덜어내어 원두를 갈고, 필터를 펼치고, 물을 끓여내 차를 만드는 행위는 지금 내가 최소한의 여유를 가지며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안도하게 하는 내적 만족이다. 잔뜩 움츠러들거나 뛰어야 했던 하루의 값싸지만 큰 효용을 가진 보상이며, 한없이 나태했던 어느 하루에서 벗어나려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길거리의 카페에서 잠깐 앉아 마시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고 여기는 생활의 구색이다.

그날 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은 나질 않지만, 나에게 차의 의미는 대략 이렇다고 생각했었다.




ps


- 찬장엔 세 종류의 차가 놓여 있다.

한정판이라 더는 구할 수도 없다며, 커피를 손수 내려 마시는 나를 위해 챙겨두었다는 지인의 커피 원두. 일본에 사는 친구가 올 때 꼭 좀 사달라고 했다는 것을 기어코 풀어 아들 손에 조금 쥐여준 엄마의 메밀차. 오랜 지인을 보러 중국까지 다녀왔던 지난여름, 숙식 등 모든 것을 대접받아 많이 죄송스러웠는데 거기에 선물로 주셔 지금도 아껴 마시는 보이차까지.. 내가 집어 온 건 단 하나도 없는 찬장 속의 차는 데워진 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따뜻한 것들이다.


- 핸드밀을 돌릴 때의 소리가 좋다, 핸드밀을 돌릴 때 손으로 전달되어 오는 떨림이 좋다. 핸드밀을 돌릴 때 좁은 방안으로 퍼지는 커피의 향이 좋다. 그래서 머신을 살 수 없다. 


2012라는 숫자가 무색할 정도로 벌써 2013의 끝자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