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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바람















점심 약속이 취소되었다. 미안하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던 탓이다. 그러나 북송리 강생이를 볼 수 없다는 건 많이 아쉬운 일인데 앞으로 두 달 정도는 숫자 8과 별을 '뻔'이라고 말하는 해환이 꼬맹이와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다. 약속 때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른(그래 봐야 11시) 예배를 드렸지만, 갑작스레 홀로 남게 된 오후는 오히려 선물처럼 다가온다. 

합정에서 망원으로 걸어오는 짧은 길에 스무 번은 고갤 들어 하늘을 바라본 것 같다. 그야말로 예술인 오늘의 하늘은 솜씨 좋은 누군가 하늘색 도화지 위에 하얀 물감으로 깃털처럼 가볍고 놀라운 붓놀림 실력을 발휘해 놓은 것 같은데 고상한 문화, 예술 작품들도 돈이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세상임을 생각하면 하늘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나는 작은 카페의 첫 손님이었다. 짧아진 머리에 수염까지 없으니 사장님은 바로 나를 못 알아보셨는데 진심으로 내 사라진 긴 머리를 아쉬워 해주시니 이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정말이지 '짧은 머리가 더 잘 어울리네요.'란 말은 내가 썩 좋아하는 칭찬이 아니다. 

바람은 피부로 느껴지기도 할 뿐 아니라 눈으로 보이기도 한다. 카페 앞과 뒤로 나 있는 널찍한 창으로 바람이 하늘하늘 들어오는 게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