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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안부












본가에서 닷새를 머물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니 나름 집을 꽤 오래 비운 셈입니다. 



쌓여있는 일거리에 대한 걱정이나 부담이 클 줄 알았는데 꼼짝달싹할 수 없는 남도 행 버스 안에서는 다른 상념만이 머리를 가득 채우더군요. 주로 그리움에 관한 상념입니다. 이제는 영영 붙잡아 둘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나 지나간 인연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존재만으로 빛나던 때가 있었으나 이제는 먼지 같은 꿈에 대한 그리움들이 심야버스 창가에 서리는 김처럼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갑니다.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우리는 늘 현재의 행복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는 사소한 존재지요. 이것은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나는 그리움이 없는 메마른 삶을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며칠 동안 많은 옛 인연을 만났답니다. 십수 년 만에 우연히 만난 어린 시절 단짝은 무엇이 그를 망설이게 했는지 먼 곳에서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고만 말하며 나의 손을 놓아주질 않습니다.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린 시절 우리가 크게 한 번 싸웠던 적이 있나 봅니다. 시간은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어 주고 관계의 끈을 다시 엮어 줍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뵌 선생님은 죄송하고 감사하게도 제게 먼저 연락을 주셨답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고백하자면 나는 누구에게나 쉽게 잊히고 말 존재라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잊힌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잊힘을 두려워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집착이 무서운 것이지요.

가장 오랜 친구들을 만나 밥을 먹고 술을 조금 마셨습니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징글징글한 아저씨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대화의 수준은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유치한 걸까요? 그러나 이 변함없는 유치함이 우리를 웃게 하고 오랫동안 함께하게 할 것입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집에만 내려가면 엄마는 자꾸만 먹을 것을 주시고 아빠는 점점 작아지십니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입니다.



일 때문에 여수엘 내려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의 고객이 제 중고등학교 친구의 대학 동기라는 것 아닌가요. 그 말을 들으니 더 정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늘 사람을 편애합니다. 친구도 편애하고 가족도 편애하지요. 일로 만나는 이들까지 편애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편애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더 아끼고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마저 알아채지 못하게 것이 지혜로운 방법인 것 같습니다.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은 낭만이나 추억 따위를 금세 잊게 해버렸지만, 바다 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푸르러 잠깐이라도 시선을 빼앗겨 버리기 충분했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만 아름다워도 언제나 복잡한 서울에서의 삶보다 적어도 두 배쯤은 감정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별에 서툴고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이지요.

여수를 찾은 건 7~8년 만이나, 돌산공원에 오른 것은 거의 15년 만인듯합니다. 빛축제라고 했는지 공원의 나무마다 LED 전선이 휘감겨 있는데, 도대체 그것이 예쁜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밤의 풍경은 인위적인 빛이 없는 모습 아니던가요.



서울행 버스에서 한 시간쯤 졸다가 이 며칠을 되짚어보니 벌써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가고 있네요. 일상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이렇게나 넓은데 왜 숨이 턱 막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생활은 다시 정오부터 시작해 새벽에 끝을 맺겠지요. 밀린 일로 가득한 겨울을 보낸다는 것은 꽤 어색한 일이지만, 아마 봄이 오면 조금 더 여유로워질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언가를 배워볼 생각입니다. 



당신의 겨울이 궁금합니다.

늘 궁금합니다.



2015 . 02 .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