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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반칙이야,,



너 때문에 또 울었다. 

빈집에 들어 온 건 반칙이잖아.

보고서를 쓰느라 이틀 밤을 지새워서 토끼 눈이 돼버렸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얼마나 멋지게 차려 입고 나갔는지 알아?
핫핑크를 끔찍이 좋아하는 당신에게 자랑하려고 
내 인생 처음으로 산 핫핑크 나이키 운동화까지 신고
하얀 바지 적당히 말아 올리고 
하얀 긴팔 위에 약간은 바래서 더 예쁜 청남방을 걸치고 
깔끔하게 면도하고, 머릴 손질하고
그리고 은은한 레몬향이 나는 향수를 뿌리고 
당신에게 돌려줄 옷가지와 당신이 그렇게 사달라고 했던 조인성이 그려진 양말과
당신의 모습이 담긴 USB와
사진관 아저씨가 연예인이냐며 그렇게 예쁘다고 칭찬한 커다란 당신의 액자를 챙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는데
너는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다.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
결국 너의 집 앞으로 갔어.
코앞에 당신이 있었는데 문 앞에 종이 가방 하나 놔두고 뒤돌아 가야만 했던 내 마음을 아니?
전자레인지에 치즈를 돌려 빵 위에 얹어 먹던 지난 겨울의 아주 사소한 기억 하나하나까지도 너무나 또렸한데,,
그렇게 추억이 쌓이고 쌓인 당신의 집에 얼마나 들어가 보고 싶었는 줄 아니?

텅 빈 집에 들어오다니. 반칙이야 당신.
그리고 들어왔으면 나갈 땐 다시 문을 잠그고 나가야지,, 
그렇게 열쇠를 문 옆에 걸어두고 그냥 나가버리면 어떻해?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구 그런 건데? 바보같으니라구. 
늘 집으로 돌아올 때면 당신이 다녀가진 않았는지, 혹시나 긴 머리카락 한 올 떨어지진 않았는지 잠깐이라도 그리워하는 내 모습이 난 너무나 좋단 말이야. 
행여나 하는 기대감마저 당신 마음대로 없애버리면 어떻하니?

사실 어쩌면 나도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랬을지도 몰라.
심장은 얼마나 뛰는지, 인사라도 제대로 건낼 수 있을런지 자신이 없었어. 
그냥 웃는 얼굴 딱 한번 보고 싶었거든. 
그리곤 앞으로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기를 기도하려 했거든,,
당신이 두고 간 책. 그리고 긴 편지. 
고마워. 
언젠간 밝게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어서 고마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르지만, 어쩌면 영영 못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편지속에 담긴 당신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

나는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도 날 사랑했는데 왜 이렇게 돼버린 건지,,
지난 날의 내 일기와 당신에게서 온 편지들을 보고야 알았어. 
이렇게 된 원인은 내게 있었는데 난 당신만 원망하고 원망했지. 
그래서 가끔은 당신이 첫사랑이 아닌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니. 결국엔 오랜 시간이, 또 내게 찾아올 다른 사랑이 아픔을 감춰주겠지만,,
지금은 내 마음에 다른 무언가를 담을 여지가 없다. 

당신도 그랬듯이 나도 행복해, 좋은 사람 만나 따위의 마지막 인사말은 안 해.
명심하라구. 사진은 맨손으로 만지지 않는다. 항상 마지막 슬로프를 조심하라. 
그리고 누군가 늘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잊지마.
장난 처럼 말했던 '서른의 약속'도 잊지 않고 있을거야. 

가뜩이나 잠 못 자서 눈이 너무 피곤하고 아팠는데 청승맞게 눈물까지 흘렸으니,, 
오늘밤은 오랫동안 원없이 자야겠다.
늘 그랬듯이 자고 나면 좀 괜찮아 질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