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이십 년 동안 등을 맞대고 잔 남동생이 있다. 그리고 어린 두 여동생이 있었다.
이삼 년 전, 겨울이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엄마는 나와 동생을 앉혀 놓고 우리 집에 딸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집에서 기를 형편이 안 돼 아동보호센터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을 위탁받아 키우시겠단다. 며칠 뒤, 센터의 선생님과 함께 이 아이들은 우리 집으로 왔고, 처음 마주침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돌하게 행동했던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주눅이 든 건 우리 가족이었다. 우리 집에 오기 전부터 이미 몇몇 다른 집과 센터를 전전하던 아이들이었기에 새로운 환경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
센터에 있는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아이들이랬다. 집안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을뿐더러 너무 큰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라 여간 힘들었는지 다른 집들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센터로 되돌려 보낸 일이 부지기수였단다. 일의 자리 덧셈 뺄셈조차 못했던 큰애는 입에서는 어디서 배운 건지 욕만 할 줄 아는 아이였고, 그 동생은 고집도 그런 고집이 없었다. 나와 내 동생 힘들게 키워 놓으시고 지금 당신의 형편도 좋지 않으면서 갑자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아이들을 키우시겠다니 할머니는 드러내놓고 대노를 하셨다.
나는 늘 입양에 대한 어떤 로망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 철부지 없는 생각이었음을 이 아이들이 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겉으로는 아이들이 잘 따르는 좋은 오빠였지만 속으로는 언젠가 제 부모 품으로 떠날 남의 집 자식으로 여겼음을 슬프게 고백한다. 이 아이들과 함께할 때마다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의 한계를 명확하게 느껴 아파하곤 했다.
엄마, 참 고생 많이 하셨다. 새벽같이 일어나 온 가족 밥을 먹이고 아이들 유치원, 학교에 보내고 나면 종일 장애인 가족을 돌보고 오셨다. 저녁이 되면 말 지지리도 안 듣는 아이들과 그보다 더욱 속을 긁어 놓으시는 할머니 사이에서 묵묵히 집안일을 하셔야만 했는데도 그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으셨다. 엄마 당신을 위한 인생이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가는 동안 부모님의 주름은 깊어만 갔고 아동보호센터와 아이들의 친부모는 우리 집에 늘 미안해하고 고마워만 했다.
지난주에 연락을 받았다. 아이들이 이제 친부모의 품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엄마, 나 내려갈까? 애들 보고 싶은데. 화요일 밤에 갔다가 수요일 아침 일찍 올라오면 돼요.” “아냐. 그냥 전화나 한번 해줘. 어차피 애들 다니던 유치원, 학교 계속 나가니까 쉽게 볼 수 있을 거야.”
오늘 오전, 아이들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갔다. 작은 녀석이 큰엄마(처음엔 우리 부모님에게 엄마 아빠라고 불렀는데 멀쩡한 부모가 있으니 나중에는 큰엄마, 큰아빠로 부르게 했다.) 보고 싶다고 목놓아 울어대서 그 친엄마가 어찌할 줄 몰라했단다. 엄마는 당분간 애들이 많이 혼란스러워 할 것 같다며 걱정하신다.
그제 집으로 편지를 보냈었고 오늘 편지를 받으신 엄마는 멋스런 것이 뭔지 쨈끔 아는 아들이라며 고마워하신다. 편지 한 장에 엄마의 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채워질 수 있으면 오죽 좋을까?
내 동생 선화, 여정아 너희 꼭 행복해야만 한다. 마음속에 있는 상처 천천히 잊어가며 착하고 바르게만 자라줘. 생각날 때마다 오빠가 기도할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