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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즉흥적 날들





눈을 뜨고 (몇 시간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5월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젊은이에겐 악몽 같은 시절도 좋은 시절이지만, 어쨌든 더위를 끔찍이 못 견디는 내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좋은 시절의 마지노선은 5월이다. 

작년, 호주에서도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며 살 수가 없었다. 투잡, 쓰리잡을 뛰는 동안 하루 이동거리만 백여 킬로미터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날이 더욱 바쁘고 힘들게 느껴짐은 쳇바퀴처럼 고정된 틀 속의 하루하루가 아니라 내게 주어지는 일들이 꽤 다양하고 즉흥적이기 때문이렸다?

    

좋은 시절의 마지막 날을 충실하게 보내겠다는 일념이 어느 정도 통했던 하루였다. 새벽녘에 잠들었지만 기필코 이른 시간에 일어나 방안에서라도 운동을 했고 학교 가기 전에는 헌혈을 했다. 연신 고갤 끄덕이며 수업을 들었고(졸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두 장의 음반과 네 권의 책을 샀다. 그리고 A와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또 음악 들으며 맥주까지 한잔하고 돌아왔지..

이제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이 생일인 A는 참 맑은 사람이다. 원래는 Before Midnight를 보기로 했었으나 Roma with Love를 선택했다. Roma with Love의 상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Before Midnight은 혼자서 봐야 한다는 마음이 서로에게 강했던 탓이다. 


Roma with Love은 Midnight In Paris처럼 몽환적인 영화다. 극 중의 우디 영감은 실제 자신의 모습을 그리려는 것 같았고 영화 속의 ‘사랑’은 Midnight In Paris보다 난잡하고 원초적이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것이지.. 감독의 능력이나 개성이 이렇게나 다르다. 우디 앨런 특유의 익살로 사랑과 욕망을 그려내었다. 그러나 사랑에 관한 주제라면 나는 여전히 고전적이고 뻔하디 뻔한 식이 좋다. 그러한 점에서 세상의 모든 사랑 이야기라는 표현이 그대로 와 닿았던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만 한 영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