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이 몇 년은 지난 오래된 필름이기도 했고 필름을 감을 때 평소완 달리 소리가 약간은 묘해 영 개운치 않기도 했던 것이 자세히 보니 사진에 손으로 그은 오선 같은 스크래치가 주욱주욱 그어져 있다. 그래도 좋다. 필름은 단점도 장점이 되게 한다.

디지털 사진이 그랬다면 이런 개똥 같은 니콘 하면서 노발대발했을 테지.


반년 이상 사진기 안에 묵혀둔 필름을 해방해준 지난 수요일.

늘 그렇듯 필름 사진을 보면서 나의 첫 감정인 좌절을 느꼈고. 그 후 자괴감으로 여지없이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며칠 지나고 찬찬히 살펴보면, 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애착이 많이 가는 건 나의 허접한 필름 사진이라는 점이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쓸데없어 보이는 단점을 장점으로, 오랜 시간을 애착으로 함께 말이다.





+ 서교동 어느 카페에 내린 비가 여름비였을까 가을비였을까.

+ 나는 오늘 너무 놀란 나머지 사진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내가 이렇게 놀란 게 얼마 만일까.

+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어젯밤(이 아니라 그제군)에 네 시간쯤 자고 일어나 웬일로 한겨울 평일에 종일 촬영을 하다 왔다.

덕분에 너무 피곤하지만, 당장 해야 할 작업거리들이 있어 새벽 네 시를 넘긴 지금까지도 잠 못 자고 그대로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사실 작업은 한 5분 하다 금세 유튜브에서 콘서트 영상들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 벌리고 쳐다보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사라장이 연주한 비탈리의 샤콘느가 헛짓의 시작이었고 이소라, 크랜베리스를 거쳐 에어로스미스와 푸 파이터즈까지.. 아 미치겠다. 내 작은 골방은 지금 음악 축제가 열린 것이다. 음악 없이 어떻게 사나? 난 못 산다.


아무튼, 이 말을 하려고 위의 사진을 올린 게 아닌데. 그러니까 나는 요즘 끽해야 일주일에 단편소설 한 편이나 겨우 읽을까? 지난가을부터 생계는 나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고 있고 여유는 돌이 되어버렸다. 어제는(아니 그제) 김작가님의 단편 소설집을 카페로 가져가 좀 읽다가 나중에 후기라도 남길 때 사용할 생각으로 비치된 서가에 끼워두고 사진을 찍어보았는데 그 옆에 나란히 붙어있던 책들, 노르웨이의 숲이나 무진기행, 그리고 까뮈의 이방인이 그렇게 어떤 양식처럼 느껴질 수 없는 거다. 지금 당장 마구마구 먹어치워야 살 것 같은, 생존을 위한 양식. 

우리는 당연히 먹어야 살 수 있지만,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해야 비로소 살아지는 그런 존재, '사람' 아닌가. 그러니까 작업은 조금 미뤄도 괜찮기는 개뿔ㅠ 몇 시야 지금.




















































사진보단, 갤러리 한편에 놓인 멈춰버린 시계와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트렁크를 더 오래 바라본








작년과는 달리 올해부터는 될 수 있는 대로 화요일을 의미 있게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월요일에 일을 하지 않으면서 나를 위한 하루를 보내기엔 미술관도 고궁들도 대부분 휴관을 하는 탓이다. 

그러나 지난가을은 벌써 까마득한데 쌓여있는 일거리들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고 게다가 어젠 보드까지 타고 왔기에 화요일인 오늘도 나는 눈을 뜨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좀비처럼 일을 해야 했다. 저녁 일곱 시가 돼서야 샤워를 하면서 눈곱을 떼었으니 참 드럽게도 산다.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까지 침침해져 하던 일을 멈췄고 늦었지만 나의 화요일을 보내기 위해 외출을 했다. 그야말로 억지로 나선 길. 그런데 날이 이렇게 추웠나. 

커피와 밀크티를 마시며 스톡홀름을 아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일기도 조금 썼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단편 하나를 읽었고 서교동의 작은 갤러리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오늘도 역시 들어가진 못하고 창밖으로 남의 작품을 몰래 엿보기만 하면서 내년쯤엔 그 작은 갤러리의 벽면을 내 사진으로 채우고 싶다는 바람만을 품었다. 


휴대폰 내비 김기사는 늘 양화대교를 건넌 후 올림픽대로를 타라고 나오지만, 집으로 갈 때만큼은 무조건 강변북로다. 10분이나 단축. 멍청한 김기사.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었고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억지로라도 쉰 것은 꽤 잘한 일이었다.
















가을과 겨울을 보내는 동안 나는 철저하게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작업에 파묻혀 살았다.(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매우 폐쇄적인 2014년의 마지막을 보내며, 동료와 연인에 대해 깊은 간절함을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내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인 연약한 나 자신을 마주하곤 했는데 결국 답은 그대들 밖에 없으리라. 늘 나를 견고하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새해가 되기를. 우리 모두 그러한 친구와 연인과 가족이 될 수 있기를.






기네스 펠트로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슬피 우는 그녀에게 크리스 마틴이 묻는다.


"What can I do for you?"

"Just hold me. You are the only one who can fix me."


그렇게 해서 나온 곡이 Coldplay의 Fix you다.

2015년에는 마틴처럼 나도, 당신도 날아오르자.



















점심 약속이 취소되었다. 미안하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던 탓이다. 그러나 북송리 강생이를 볼 수 없다는 건 많이 아쉬운 일인데 앞으로 두 달 정도는 숫자 8과 별을 '뻔'이라고 말하는 해환이 꼬맹이와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다. 약속 때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른(그래 봐야 11시) 예배를 드렸지만, 갑작스레 홀로 남게 된 오후는 오히려 선물처럼 다가온다. 

합정에서 망원으로 걸어오는 짧은 길에 스무 번은 고갤 들어 하늘을 바라본 것 같다. 그야말로 예술인 오늘의 하늘은 솜씨 좋은 누군가 하늘색 도화지 위에 하얀 물감으로 깃털처럼 가볍고 놀라운 붓놀림 실력을 발휘해 놓은 것 같은데 고상한 문화, 예술 작품들도 돈이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세상임을 생각하면 하늘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나는 작은 카페의 첫 손님이었다. 짧아진 머리에 수염까지 없으니 사장님은 바로 나를 못 알아보셨는데 진심으로 내 사라진 긴 머리를 아쉬워 해주시니 이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정말이지 '짧은 머리가 더 잘 어울리네요.'란 말은 내가 썩 좋아하는 칭찬이 아니다. 

바람은 피부로 느껴지기도 할 뿐 아니라 눈으로 보이기도 한다. 카페 앞과 뒤로 나 있는 널찍한 창으로 바람이 하늘하늘 들어오는 게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