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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어제는 부암동 석파정에서 별당 뒤꼍 길로 내려오다 숲길이 끝나고 빛이 만나는 곳에 갑자기 멈춰 지독히 고독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바라보는 부자(父子)가 있었음에도 갑자기 혼이 빠진 사람처럼 수 초간 고독을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날의 외로움이 되려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제야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발걸음이 가볍다. 사진은 제주,벌판 위의 왕따나무를 담으려 찾아갔지만 짙은 안개에 나무 한 그루는 온데간데없고 별수 없이 내가 왕따처럼 서 있어야만 했다. 더보기
그녀가 달린 이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큰 영광이자 행운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만을 들어주는 것이 아닌 나 역시 상대방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몇 시간이고 앉아 누군가의 말을 들어준다는 게 말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인듯하다. 나는 좀처럼 내 흥미를 끌지 못하는 사람이나 소재 등에 대해 집중을 잘하지 못하는 편이다. 반드시 생산적인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과의 적당한 간극 유지가 중요한데 그것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대화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핵심이라 믿는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야기 혹은 대화에 관한 것이 아닌, '달리는 이유'에 관한 것이다. 나는 최근 꽤 지적이고 유능한 분을 알게 되었고 몇 차례 만나 온갖 잡다한 이야.. 더보기
화가가 있던 자리 지나가는 길에 어깨너머로 노화백의 팔레트와 붓질을 훔쳐본 기억은 비단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다. 돌담을 갤러리 삼고 능숙하게 그림을 그리다 행인의 말 한마디 전해오면 매번 넉살 좋게 답해주는 노화백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덕수궁의 한 풍경이었다. 작년 봄이었을까? 함께 길을 걸었던 엄마는 아이처럼 그림들을 좋아했고, 칭찬에 흥이 난 노화백의 입꼬리가 번지니 볼 위의 검버섯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들보다 덕수궁길의 노화백 같은 분들이 진짜 랜드마크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노화백의 부고 소식을 들은 건 며칠 전 광화문을 지나면서였다.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더보기
가을엔 입추가 지났다. 의례적으로 느껴지는 절기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놀랍게도 여름과는 전혀 다른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니 반갑기에 앞서 신기하기까지 하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입추'를 정해 놓았을까? 그제는 웬일로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아침의 공기며 빛깔은 푸르다. 가을엔 이 좋은 아침을 너무 자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가을엔 사랑하라는 인사말을 들었다. 사랑 말고 달리할 게 떠오르지 않아 그러겠노라도 답했다. 다가올 좋은 계절이 벌써부터 아련하고 아쉽고 그렇다. 더보기
Cafe Stockholm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장소가 있다.상수동 336-16번지, 카페 스톡홀름이 바로 그곳이다. 2년 전,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고서 나만의 장소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서너 달을 이 카페 저 카페로 돌아다녔었다. 보라색 페인트로 칠해진 상수동의 스톡홀름을 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작은 공간에 홀로 들어서기까지는.. 용기, 희한하게도 왠지 모를 용기가 필요했다.가볼까? 하고 몇 번을 문 앞에서 돌아섰는지... 왜 그랬을까? 몇 달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내밀한 공간을 찾기 위한 기준이 있었다. 다른 메뉴는 크게 상관없지만 커피는 맛있어야 한다. 조용해야 한다. 큰 창이 있어야 하고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카페 안의 음악이 좋아야 한다. 작년 5월 5일의 일기에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