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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세린 늘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건 피부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화장실로 가는 몇 걸음이 으슬으슬 하다면,, 나도 모르게 돋은 얼굴의 각질들이 각질각질 질각질각 노래를 부른다면,, 불어오는 찬바람에 입술이 터 립글로즈를 바른 애인의 입맞춤이 애타게 생각난다면,, 그 땐 바야흐로 가을인 것이다. 20년을 살았던 부모님의 집에도, 여름이고 겨울이고 방학 때면 빠짐없이 지냈던 시골의 농장에도, 생각보다 바람 같이 지나갔던 군 시절의 관물대에도, 코딱지만한 고시원의 단칸 방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온 베트남과 홍콩에서도, 지금 사는 미아리의 수해 경험 있는 꽤 넓은 반지하 집에도, 그러니깐 종합하자면 내 인생에 가장 오랫동안 함께 했던 것. 그것은 바로 바.세.린. Vaseline Intensi.. 더보기
짝퉁 가방  아픈 이들을 위로하느라, 지난 여름을 블로그에 새기느라 시간을 보내다 동틀 때쯤 잠들었다가 한낮에 깼다. 학교로 가기 위해 허겁지겁 씻고 옷을 고른다. '오늘은 왠지 가을 산을 오르는 기분을 내고 싶어.' 마냥 걸으며 사진을 찍기 위한 길을 나설 때 늘 내 발을 편하게 해주는 노란 운동화를 신고 베트남에서 짐이 많아져 꼭 사야만 했던 짝퉁 주황색 노스페이스 가방을 한국 와서 처음으로 맸다. 짝퉁인 내 가방은 나부터 시작해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뿐더러 알지도 못 할 것이다. 명품으로 둘러도 짝퉁 의심을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짝퉁을 걸쳐도 명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 있다. 달랑 가방 하나 덕에 바탕이 아니라 속이 제대로인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등굣길에 했었다. 더보기
여름 꽤 영화 같았던 여름이었다. 긴 장마철에 반지하인 내 집은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었고 벽지엔 물이 스몄다. 장마가 끝났다. 누렇게 물이 먹은 벽지는 정말 거짓말처럼 단 하루 만에 한여름의 햇살에 말라버렸고, 곰팡이도 더 이상 피어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와 난 눅눅했다. 여름과 함께 찾아온 소원함이었다. 7월 26일. 장마 때 보다 더욱 많은 비가 한번에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때가 화요일이었나,,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비가 오든 말든 걱정 없이 집에서 느긋하게 KIA와 삼성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저녁 9시쯤, 8회였던가 9회였던가 기아의 위태로운 리드였다. 경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올라온 한기주가 역전 쓰리런을 얻어 맞는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덜컥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더보기
황혼 한강 위를 지나 가는데 옆자리에 앉으신 할아버지께서 지나가듯 말하신다. '황혼의 색깔은 저렇게 예쁜데 왜 우리의 황혼은 이러냐.' 씁쓸한 회한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저 황혼의 색깔처럼 아름답게 늙어 가자’란 꿈을 새긴다. 그런데 아름답게 살아가는 건 또 어떤 걸까? 황혼과 같은 인생은 분명 돈, 힘과 명예가 아닐 테지,, 더보기
반칙이야,, 너 때문에 또 울었다. 빈집에 들어 온 건 반칙이잖아. 보고서를 쓰느라 이틀 밤을 지새워서 토끼 눈이 돼버렸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얼마나 멋지게 차려 입고 나갔는지 알아? 핫핑크를 끔찍이 좋아하는 당신에게 자랑하려고 내 인생 처음으로 산 핫핑크 나이키 운동화까지 신고 하얀 바지 적당히 말아 올리고 하얀 긴팔 위에 약간은 바래서 더 예쁜 청남방을 걸치고 깔끔하게 면도하고, 머릴 손질하고 그리고 은은한 레몬향이 나는 향수를 뿌리고 당신에게 돌려줄 옷가지와 당신이 그렇게 사달라고 했던 조인성이 그려진 양말과 당신의 모습이 담긴 USB와 사진관 아저씨가 연예인이냐며 그렇게 예쁘다고 칭찬한 커다란 당신의 액자를 챙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는데 너는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다.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 결국 너의.. 더보기